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3 동의대학교 사태 (문단 편집) == 경과 == 1989년 5월 1일, [[동의대학교]] 학생들은 전날 국제노동절 대회의 원천 봉쇄에 항의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정오경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진출해 인근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카빈 소총으로 14발의 공포탄을 발사한 후 주동자 정성원을 체포했고,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자 150m를 따라가 공포탄을 10발 더 쐈다. 5월 2일 14시 30분경 동의대생 600여 명이 자연대 앞 건물에서 '총기난사 규탄 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며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재차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8명을 추가로 검거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학내 집회 뒤 교문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경남도경 기동대 80중대 소속 전경 5명을 납치하여 도서관 7층 전산실에 [[감금]]하고 17시 30분경부터 정성원의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동의대학교 캠퍼스는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가파른 경사지에 형성돼 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방어하면 진입하기 굉장히 까다롭기로 악명 높았다. 한편 학생 대표들은 전날 파출소 습격 중 연행된 정성원 및 이날 시위로 연행된 학생 8명과 전경 5명을 맞바꾸자고 경찰 측에 제의했으나 경찰은 정성원은 이미 구속된 상황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도서관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던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했는데 학생들의 요구는 더욱 강경해졌다. 학생들은 전날의 총기 난사에 대한 책임자 처벌까지 요구하고 나섰고 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5월 3일 오전 5시 30분경, 부산시경은 김정웅 경찰국장의 지휘 하에 5개 중대 700여 명을 동원해 진압 작전에 나섰다. 경찰은 1층 사무실 유리창에 걸린 쇠창살을 [[절단기]]로 자르고 현관의 대형 유리창을 부순 후 [[바리케이드]]를 제거했다. 당시 2층과 4층에서 자던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며 올라오는 경찰들에게 의자 등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납치한 인질들을 데리고 7층으로 피신했다. 옥상까지 밀린 학생들은 7층 세미나실에 화염병 상자를 쌓았으나 경찰은 계속해서 진입을 시도했고, 이 때 7층 도서관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여[* 시너가 뿌려져 있었다는 것은 거짓임이 법원에서도 증명됨.] 조덕래 순경 등 2명이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숨졌고 김명화 상경 등 4명은 불길을 피해 창문을 깨며 뛰어내리거나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이 외에 경찰 12명이 화상을 입었고 5월 26일 서원석 수경이 사망하여 부상자는 11명으로 기록되었다. 사건 직후 학생 91명이 구속, 그 중 75명이 기소되었고 이들은 전원 제적되었다. 검찰은 5월 3일로 예정되었던 동의대 총학생회장 선거와 관련해서 부산/울산 지역 총학생협의회가 지지했던 후보와 당시 총학생회 간부들의 권력 다툼으로 사건이 터졌으며 학생들이 7층 세미나실 복도 중앙에 화염병 40개가 들어 있는 소주상자 두 개를 쌓아 두고 그 위에 두루마리 화장지 50개와 천 조각을 놓은 뒤 석유와 시너를 뿌렸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검찰은 화재로 인해 경찰관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을 가능성을 예측하고서도 사전에 치밀한 모의로 화재를 냈다고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